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감동 스토리...
손양원 목사(1902~1950)
- 1902년 경남 함안 출생
- 1915년 칠원보통학교(초등학교)시절 궁성요배(일본천왕에게 절을 하는 것) 거절 이유로 퇴학
- 1923년 동경 스가모 중학교 졸업
- 1925년 경상남도 성경학원 졸업
- 1938년 평양장로신학교 졸업 후 전남 여수 애양원(한센병 환자수용소)교회에서 시무
- 1940~45년 신사참배거부 여수경찰서 구금
- 1950년 9월 29일 한국전쟁 때 행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동료와 신도의 피난권유를 거절, 북한군에 의해 순교
손양원 목사(孫良源, 1902년∼1950년)는 누구인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여 아버지 손종일 장로의 신앙을 물려받아 성장하였다. 집안에서 최초로 고난 속에 복음을 받아들인 아버지의 단호한 신앙이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가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와 6.25전쟁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많은 고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동방 요배(해뜨는 동쪽의 일왕이 있는 곳에 경례를 하라는 것)를 거절한 이유로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고, 신학교 졸업 후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만 5년의 감옥 생활을 하다 광복이 되어서야 출옥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순천에 있던 두 아들이 반란군인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범이 체포되었지만 그에 대한 구명 요구를 통해 그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의 양아들로 삼아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민족의 비극인 6.25가 발발하고 여수 지역에서 퇴각을 준비 중이던 공산군에 의해 전향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총살당하고 말았다. 그때는 수도 서울이 탈환되던 1950년 9월28일 새벽 그의 나이 49세였다.
일제시대 감옥 생활
손양원 목사하면 떠오르는 교회가 여수 애양원 교회이다. 애양원은 당시에도 한센병(나병) 환자들이 1,000여명 가까이 요양을 하고 있던 곳이다. 그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지역에서 사역을 하다 1939년 여수 애양원 교회의 청빙을 받아 사역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에 간지 만 1년이 지날 때 쯤 애양원 교회와 타 지역 부흥회 등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장기를 교회 내에 부착하는 것을 거부토록 하였던 설교와 행위들이 문제가 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고 만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키려고 해서 시작된 고난이었다. 그렇게 그는 해방이 되기까지 만 5년을 옥중에서 일제와 신앙으로 인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이념의 갈등 속에 두 아들을 보내고...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라는 경계선이 생겨 남과 북으로 나뉘어지게 되고 결국 남한에서는 단독 정부수립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소속의 군인들 중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주동하여 2천 여명의 병사들이 여수 지역에서 봉기하는 여수 순천사건이 발생하게 되다. 이로 인해 이들을 정부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여수와 순천 주민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 순천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도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좌익 단체 청년들에게 끌려가 순교하고 만다.
그런데, 손 목사는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여수 애양원에서 장례식을 하며 두 아들을 총살시킨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그를 회개시켜 아들로 삼겠다는 발표를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다행히 아들을 죽였던 안재선이라는 청년을 정부군에 의해 찾아내게 되었고 구명 요청을 통해 다행히 그의 목숨을 구해 내어 양아들로 삼게 된다. 손양원 목사와 사모 정양순 여사가 그 청년을 만나 양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게 되면 정말 가슴 뭉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친구 목사인 안용준 목사가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전쟁 속에서도 오직 주님!
6.25사변 때 여수에 주둔해 있던 북한 공산군들이 전세가 불리해지며 퇴각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잡아두었던 신앙인들이나 주민들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일이 있었다. 손양원 목사는 유물론자들로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공산주의를 거부하다 여수를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순교당하고 말았다. 그는 순교 직전까지도 공산군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가르는 혼란의 시기에 복음을 받아드린 이후 순교 직전까지 고난 속에서 주님만을 붙들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
그는 마치 순교하기 위해 살았던 사람처럼 일제시대 때나 6.25사변 때나 복음을 위해 죽음을 두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설교는 첫째도 순교, 둘째도 순교, 셋째도 순교였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감동 영상
손양원 목사 옥중에서 써 내려간 사랑의 편지
손양원 목사 사랑의 원자탄
강수정 - 주님 고대가 (손양원 작사)
창작오페라 '손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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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손양원>의 배경 및 줄거리 요약
오페라 <손양원>은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여러 범죄로 인해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통해 용서와 사랑이 흘러 넘치는 사회 분위기로 전환되기 원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공연이다.
1949년 백범 김구 선생님는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이다.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양원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공산주의도 이길 수 있고 남북통일도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고(故)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을 극찬했다.
손양원 목사는 경남 하남에서 1902년에 출생해 전남 여수 애양원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러는 중 두 아들을 공산분자에게 총살당하게 했지만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은 사랑의 원자탄이다. 나병 환자촌에서 목회를 하고 북한군에 의해 순교 당했다.
이번 창착오페라는 박재훈 박사의 작품이다. 박재훈 박사는 1922년 생으로 만 90세의 노년에 귀한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이번 작품은 3월 8~1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오는 6월 1, 2, 3일에는 예월문화원에서 공연한다. 특히 이번 창작 오페라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8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 위대한 손양원 목사의 발자취를 기록했다. 박재훈 박사는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품은 헌신과 사랑,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나병 환자와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자세와 민족정신의 교훈을 본받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면서 “손양원 목사의 사랑, 헌신, 믿음, 교훈,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교훈을 주고 사랑을 나누고자 기획하게 되었다”는 취지를 밝혔다.
애국, 신앙, 사라을 모토로 한 고려오페라단에서 주최한 이번 창작오페라는 합창으로 시작된다. 오페라는 총 2막이며, 1막 당 10장의 장면이 담겨있다. 1막은 손양원 목사의 주 무대 애양원을 배경으로 했으며, 2막은 순천 경찰서 앞이다.
출연진들의 말말말
장수동 감독
고려오페라단과 함께 최초 오페라 안중근을 1995년에 했습니다. 청와대에 계시는 분들부터 강원도 초등학생까지 아우르는 온 국민의 오페라 에스더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에스더는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최초 기독교 오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되는 오페라 <손양원>은 1948년 10월, 한반도 제일 남쪽에 있는 여수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입니다. 특히 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한 최초 오페라 <에스더> 후에 우리 한민족이야기를 담은 두 번째 오페라라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이야기를 담은 오페라<손양원>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테너 이동현 손양원 목사 역
순교자 역인 손양원 목사 역할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죄스럽습니다. 그리고 과연 제가 이렇게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2년 전 <내 잔이 넘치나이다>에서 순교자 맹이순 전도사님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무대 위에서 순교하고 흰 천이 제 몸에 덮여지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과연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는데 공연을 마치고 귀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귀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능력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이번 오페라<손양원>도 박재훈 박사님께서 손양원 역할을 맡겨주셔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매번 느끼지만 제가 단지 성악과로서 소리만 내서는 훌륭한 오페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 역할을 통해 이 시대 많은 교계의 목회자들과 믿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들려줘야할 메시지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성악가 이전에 신앙인입니다. 저는 보통 성악가처럼 보잘 것 없는 성악가로서의 고집과 자만감, 음악성을 내세우기가 쉬웠지만 이번 오페라를 하면서 처음 시작과 끝을 기도로 했다는 것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소프라노 이현정 딸 손동희 역
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 역을 맡은 이현정입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두 오빠의 순교하는 모습을 보면서 딸로서 그것을 관중들에게 대신 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번 역할을 하면서 성악가의 모습만으로는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메시지로 관중들을 감동시키고 순교의 역사를 접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는데 기도하면서 제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페라를 기도로 시작하고 마침으로 저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역할이지만 중요한 역을 맡겨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메조 소프라노 양송미 정양순 사모 역
다른 오페라를 할 때처럼 섭외가 들어왔기 때문에 스케줄을 보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연습하는 과정 과정에서 제 마음이 많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살아가는 삶의 기준도 확실하게 변화된 것이 이번 작품을 하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을 통해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분명한 기준이 생겼습니다. 지휘자 선생님이 주신 손양원 목사님 일대기 책을 선물 받고 밤새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손 목사님의 삶을 보며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신앙을 지켜나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 목사님 사모님 또한 살아가는 목표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남편을 향한 내조와 기도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가슴깊이 느낀 것은 박재훈 박사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저도 이 작품의 배우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이 공연에 임하겠습니다.
테너 윤병길 아들 손동인 역
손동인 역에 대한 생각이 많이 없었는데 계속 배역을 하는 손동인 역에 대해 굉장히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순교를 당하기 바로 전에 안태성이라는 사람이 마지막 소원을 물을 때 제가 찬송가를 부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찬송가를 부를 수 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약 제가 그 입장에 들어가서 대사를 그냥 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순간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순교 직전에 ‘하늘나라 밝은 길’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는데 처음에 연습하면서 슬퍼졌습니다. 그러나 손동인 역에 깊이 들어가서 보면 슬픈 모습이 아니라 순교당하는 그 순간까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놓지 않고 찬양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때 손동인은 기쁜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릅니다. 저는 이번 오페라를 통해 나흘이라는 순간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베이스 함석현 나덕환 목사(승주교회) 역
이번 오페라에서 베이스 역에 두 역할이 있습니다. 두 베이스 역 가운데 나덕환 목사님 역할을 하게 돼서 기쁩니다. 처음에는 역이 작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페라 연습을 시작과 진행 과정에서 열심히 준비하시는 지휘자님, 진행자들의 뜨거운 사명감으로 진행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또한 더 작은 역할을 하는 합창단과 관계없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오페라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은혜 받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오페라를 할 수 있는 순간이 과연 몇 번이나 될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감사함으로 오페라를 준비하게 되어 기쁩니다.
오페라 <손양원>이 완성되기까지
2004년 전남 여수에 다녀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 순교 기념관에 들어갔다가 나병환자의 발에 고름이 생긴 그림을 봤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고름을 뺄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7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나병 환자를 치료할 치료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이 입으로 그 고름을 빨아내는 것을 봤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불쌍을 사람을 보되 조건 없이 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기가 빨아냈습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고 울었습니다. 이 땅에 이런 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는 다시 돌아가서 어느 작가에게 이 이야기를 쓰라고 주었습니다. 저도 원고를 가지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안 나왔습니다. 억지로 짜서 1년 동안 1막을 썼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음악은 흘러 넘쳐 나와야 진정한 음악의 맛이 있는데 그렇지 않고는 예술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민하다가 찢어버렸습니다. 그때 2년이 지났는데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 에스더를 써 준 그 작가분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팩스를 줬더니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합창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합창 가운데 나병환자들의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우리 육신과 영혼에 병이 들었습니다. 고쳐주십시오. 주님 우리 영혼이 병이 들었습니다”라는 소리로 합창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이 갈라진 후부터 병이 들었습니다. 남쪽은 경제가 부흥되어서 잘 먹고 잘 살지만 북쪽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남쪽은 자유지만 북쪽은 독재였습니다. 한반도가 두 쪽이 됐습니다. 남쪽은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민족과 슬픈 자, 가난한 자를 위해 돕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돈이면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보통 병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거룩하신 분에 대한 이야기를 오페라로 창작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 6월 3일(경남 함안군) ~ 1950년 9월 28일 (향년 48세) | 호랑이띠, 쌍둥이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