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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일반섭리(청함)와 특별섭리(택함)
제가 40여년 전에 어떤 신앙서적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아련한 이야기인데, 유럽에서 한창 개혁과 부흥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를 때인 중세기, 복음이 폭넓게 전파되어 나아갈 때 의외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John Calvin의 ‘예정교리’였습니다.
예정교리에 의하면 하나님께선 구원받을 사람과 단죄할 사람들을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것으로, 이 교리를 접한 범죄 전력자(前歷者)들은, 이미 구원에서 탈락된 것으로 이해하고, 더 이상 믿어봤자 소용없는 것이라 생각하여, 스스로 믿음에서 떠나는 안타까운 사건들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잘못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를 유발하며, 얼마나 많은 귀한생명을 사망으로 돌아가게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事例)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정론’은 당시에 많은 생명을 실족케 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경된 인도자가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나, 잘못된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모두에게 돌이킬 수없는 화(禍)가 될 수 있음을 느낀다면, 우리의 지적신앙이 구석구석에서 개선되어져야한다는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하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인 성서내용이 중세기였던 당시에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닌데, 어째서 ‘예정론’이 그렇게 심각한 신앙이탈현상을 낳게 하였을까.
그것은 성서기록 중에 ‘예정’에 관한 말씀이 곳곳에 나타나 있지만, 그때까지 예정에 관한 문제를 깊이 연구하거나 의미가 크게 부각되지 않다가 John Calvin이 예정에 관한 의미를 크게 부각시키는 예정교리(豫定敎理)를 주창하고 나왔기 때문이며, 그것을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악과 신앙구조 속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결정적 역할이 되어, 구원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므로, 그들 스스로가 자포자기적 함정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아직까지 예정교리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교리 자체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모순투성이로 만들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예정섭리는 물론, 성서 곳곳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없었던 것이라 느낍니다.
필자는 현재 예정교리를 신조로 삼고 있는 장로교에 적을 두고 있지만, 이렇게 예정교리가 아직껏 신자들에게 명확한 이해를 돕지 못하고 오히려 미궁(迷宮) 속에 빠뜨린 것을 느낀 후에, 차라리 이해하기 쉽고 안전한 John Wesley의 예지교리((豫知敎理)가 신자들에게는 더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x)
사실 Calvinist들과 Wesleyan들 사이에도 크고 작은 논쟁이 수없이 있어 왔고, Calvinist들 중에는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예정섭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오(深奧)하신 뜻을 더욱 은혜롭게 느낄 수 있는 신앙성숙적 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정에 관한 성서내용을 몇 군데 찾아보고 이해를 넓혀 나가도록 해보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어떤 말이나 단어에 있어서 글자에만 얽매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 어떤 뜻으로 쓰였는가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같은 글자라 할지라도 쓰이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글자라 할지라도 같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1서5:18) 말씀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니,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를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야기(惹起) 할 것입니다.
單語는 다를지라도, 함축된 성서적 의미가 거의 같은 경우로 쓰이는 것 중에 하나가 지금부터 다루게 될 ‘예정 = 택함’이란 것입니다.
각설(却說)하고 예정과 택함에 관한 말씀을 몇 구절 적어봅니다.
(신7:6)-<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롬9: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갈1: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엡1:4-12)-<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중략...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벧후 1: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마22:3-14)-<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택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이스라엘)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이방)하여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모든 인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성령)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성령)을 입지 않고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구원의 자리에 이른 자)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천국에 이른 자)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우리들이 혹시 처음부터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게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는다면, 그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견고히 자리 잡아, 그 고정관념의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여기서 ‘청함’이나 ‘택함’ ‘예복’이란 말도 잘 구분사용하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단어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청함’은 ‘초청함’의 줄인 말이고 ‘택함’은 ‘선택함’의 줄인 말로서, 이 두 단어가 쓰이는 뜻은 분명히 다르지만 (마22:3, 8)에서처럼 혼용하여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계속~~~~~
팔순 맞으신 연로하신 유재용 전도사님의 뜻을 존중해서
한페이지가 넘어간 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본 글에 < 예정섭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연구하고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오(深奧)하신 뜻을 더욱 은혜롭게 느낄 수 있는 신앙성숙적 교리>라고
쓴 것은 비아냥거림이 아니라 진심인 것을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기본적으로 입력된 메카니즘같은 예정은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깊이있게 하며
성경의 상반된 곳을 아우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칼빈의 예정론은 전 인류적인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한 예지론보다 연구하고 알게 되는 절차상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실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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